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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조명 효과에서 벗어나자

by 해보애리스 2021. 12. 17.

윌리엄 제임스는 <심리학의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회에서 밀려나 모든 구성원으로부터 완전한 무시를 당하는 것 - 이런 일이 물리적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 보다 더 잔인한 벌은 생각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방 안에 들어가도 아무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을 해도 대꾸도 안 하고, 무슨 짓을 해도 신경도 쓰지 않고, 만나는 모든 사람이 죽은 사람 취급을 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상대하듯 한다면, 오래지 않아 울화와 무력한 절망감을 견디지 못해 차라리 잔인한 고문을 당하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누가 나를 향해 얼굴을 찡그리면 상심하게 되고, 못났다고 하면 정말 내가 못난 것처럼 느껴진다. 버림받고 소외되는 것에 대한 불안이 엄습해오기 때문이다. 반면 누가 나를 칭찬하면 기분이 좋고, 누가 나를 기억해 주면 갑자기 인생이 살 만한 것이 되기도 한다. 누가 나를 무시하든 조롱하든 그에 상처받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타인이 나를 경탄의 시선으로 바라봐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요즘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 사람들은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 에 집착하고 짧은 시간 내에 남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만남은 짧은 것이 특징이다. 예전에 이동이 적었던 시대에는 만남의 기간 역시 길었다. 사람들은 한집과 한직장에서 오랫동안 머물렀고, 따라서 같은 사람과 오래도록 이웃을 하고 거래를 하며 지냈다. 그 결과 오랜 시간을 두고 상대를 만나면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천천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세계가 글로벌화되면서 사람들의 이동 또한 활발해졌다. 서울에서 이른 아침 회의에 참석한 뒤 일본 출장을 다녀와서 밤 늦게 부산에서 친구를 만나는 게 가능하다. 여행이나 어학 연수를 가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학교와 학원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사이버 공간 안에서 새롭게 만나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 게다가 요즘은 3~4년에 한 번씩 직장을 옮기고, 이사를 간다.

즉 사람들은 이제 한곳에 정착해 살기보다는 여기저기 이동하며 살게 되었고, 따라서 만남과 이별의 횟수도 늘어났다. 만남의 형태 역시 서로의 이익에 따라 만났다 금방 헤어지는 단기간의 만남이 주를 이룬다. 짧은 만남은 상대를 알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럴 때 우리가 상대를 파악하는 방법은 첫인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얼마나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느냐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해진다.

한편 현대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이다. 지나간 과거는 쓸모가 없고, 미래는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재의 경험만이 중요하게 되고, 따라서 사물을 파악하는 것은 그때그때 보고 느끼는 감각과 직관에 의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성공하려면 첫인상부터 남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현대의 젊은이들은 '내가 누구인가?' 보다는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더 집착한다. 남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그들이 자신에게 반하고 호감을 갖게 하기 위해 외모를 뜯어고치고 유머집을 외운다. 그리고 남들이 자신을 경탄의 눈으로 멋있다고 바라봐줄 때 비로소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갖는다.

그러나 이처럼 타인의 환호에 목숨 거는 사람은 만성적인 공허감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타인의 시선이란 언제든지 떠나갈 수 있는 것으로, 아무도 쳐다보지 않으면 그 즉시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버림받은 존재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지 않는 타인에 대한 분노와 타인의 사랑을 잃어버리는 데 대한 불안으로 공허감에 시달리게 된다.

코넬 대학교의 토머스 길로비치 교수는 어느 날 한 학생에게 가수 배리 매닐로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게 한 다음 실험실에 들어가게 했다. 잠시만 그곳에 있다 나오라고 했는데, 그 안에는 대여섯 명의 학생이 있었다. 실험실에서 나온 학생에게 길로비치 교수가 물었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 중 당신이 매닐로 티셔츠를 입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그는 46퍼센트 정도가 자신을 기억할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 학생이 매닐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고 답한 사람은 23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코미디언 제리 세인필드와 인권 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가지고 똑같은 실험을 했는데. 티셔츠를 입은 학생은 48퍼센트가 기억할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8퍼센트밖에 안 됐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졌을까? 그것은 '조명 효과(spotlight effect)'라는 심리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조명 효과란 자신을 연극 무대에 선 주인공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무대에 오르면 주인공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관객들은 주인공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주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대에 오른 주인공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타처럼 조명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하게 신경을 쓴다. 예전에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한 번씩은 다 했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은 자신을 무대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자신을 쳐다보는 관객인 것처럼 생각한다. 이를 '상상 속의 청중(imaginary audience)'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거울 앞에서 머리와 옷매무새를 수십 번 가다듬으며, 심지어 밖으로 나갔다가 금세 돌아와서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기도 한다. 그뿐인다. 실수를 저지르면 무지무지하게 창피해한다. 모든 사람이 내 실수를 목격하고는 비웃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만 바라보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함으로써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목숨 걸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다른 사람들은 실험 결과에서도 봤듯이 생각만큼 나를 주시하지 않는다. 그저 나 혼자 조명을 켜 놓고 나 혼자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나만이 스타이고, 나만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들 인생의 주인공이고, 그들의 인생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살고 있다는 안정감과 자신감,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결국 내가 나 자신을 향해 환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남들의 시선에 목숨거느라 너무 많은 부분을 외양에만 투자하게 되면 내적 성숙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든다. 인생을 허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내가 나의 진정한 팬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더 이상 타인의 시선에 목숨 걸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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