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여행을 떠나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낯선 세상에서 보고 느낄 것들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큰 것이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란 사실을. 주변에 아는 사람은커녕 낯선 사람들뿐일 텐데 길을 잃으면 어떡하지? 말도 안 통하는데 열차나 비행기를 잘못 타거나 놓치면 어떡하지? 호텔이나 유스호스텔은 잘 찾아갈 수 있을까? 여권이나 지갑을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혹시 병이라도 나면 어떻게 할까? 등등... 그 불안감은 '파리나 로마에 가면 특히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 '베네치아에서는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 고조된다.
그러나 여행을 해 보면 우리는 알게 된다. 길을 잃고, 열차를 놓치고, 유스호스텔을 못 찾아도 살아남을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여권과 지갑을 잃으면 여행 일정에 많은 차질을 빚게 되지만 그것 또한 새로운 경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심지어 낯선 사람들이 보여 주는 호의에 무척이나 놀라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여행자가 '나도 우리나라에 여행 오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 줘야지' 하는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낯선 세상과 낯선 사람들이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만큼 낯선 무엇인가는 우리에게 먼저 '위험' 신호로 다가온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 앞에서는 멈칫거리게 마련이다. 내가 걸어가야 할 저 세상이 안전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지? 그때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바로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다.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 즉 '베이식 트러스트(basic trust)'는 세 살 이전 엄마와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아기는 처음에 엄마의 배 속만이 자기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러나 태어나 보니 신기하고 낯선 것이 너무도 많다. 아이는 호기심에 그것들을 만져 보고, 맛을 보고, 촉감을 느껴 보고, 귀를 기울이고, 말을 걸기도 해 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겁이 나 주위를 둘러보며 엄마를 찾는다. 그때 엄마가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으면 안심하게 된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아이는 엄마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갖게 된다. 그래서 엄마가 잠깐 안 보여도 엄마가 곧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마음 놓고 낯선 세상을 탐험한다.
그러나 아이가 쳐다봐도 엄마가 눈을 마주쳐 주지 않거나 엄마의 사랑이 너무 변덕스러우면 엄마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흔들리게 된다. 이제 아이는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엄마가 영원히 사라져 버릴까 봐 불안해하면서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쓰게 된다. 그러면 아이는 마음 놓고 낯선 세상을 마주하지 못한다.
이처럼 베이식 트러스트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탐험과 모험을 할 수 있는 밑바탕을 이룬다.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낯선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고, 낯선 곳에 갈 수 있으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상을 믿는다 해도 세상은 알 수 없는 것과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서로 속고 속이며,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어느 날 테러와 전쟁이 일어나 순식간에 많은 사람이 몰살당하며,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경제의 흐름이 우리에게 불안감을 안겨 준다. 이런 세상을 믿으라고? 소용 가치가 없어지면 언제든 쥐도 새도 모르게 폐기 처분될 수 있는, 그래서 두 눈 똑바로 뜨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을 믿고 살라고?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세상은 만만하기는커녕 더욱더 비정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익에 따라 적과 친구가 수시로 바뀌고, 자칫 허점이라도 보였다가는 그것이 나중에 어떤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지 모르는, 항상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되는 피곤한 관계가 도처에 가득하다.
게다가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큰 상처를 주는 것은 다름 아닌 가까운 사람들이다. 나와 같이 상사 흉을 보던 절친한 동료가 다음 날 상사에게 가서 고자질을 한다. '내 동생같이 느껴져서 든든하다'고 말한 상사가 어느 날 내 아이디어를 마치 자기 것인 양 훔쳐 재빠르게 보고서를 작성한다. 미안하지만 한 달만 빌려 달라며 1000만 원을 꿔 가더니 갚을 생각을 안 하는 친구도 있다.
이처럼 서로의 필요에 따라 관계가 설정되고 시시각각 변하는 삭막한 세상에서 사람 사이의 진정성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사람들은 회의하게 된다.
그렇다면 가족이 안전지대일까? 카프카는 그의 소설 <변신>에서 '아니다' 라며 고개를 젓는다. 세일즈맨으로 일하면서 부모님과 여동생을 부양하던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자신이 벌레로 변해 있음을 발견한다. 행여 그레고르의 기분을 상하게 할세라 문 두드리는 것조차 조심하던 가족들의 태도는 이때부터 돌변하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기절한 뒤 다시는 아들을 보지 않으려 한다. 아들 대신 일을 해야 하는 아버지는 벌레로 변한 아들을 경명하고 무시하며, 급기야 밟아 죽이려고 하다가 어머니의 만류로 그만둔다. 유일하게 그레고르의 방을 청소해 주고, 그에게 우유와 빵을 가져다 주던 여동생도 차츰 변해 간다.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그레고르의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가고, 가족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와 더 큰 상처만 받을 뿐이다. 결국 여동생은 손으로 탁자를 쾅 내리치며 말한다.
"만약 저게 오빠라면, 제 발로 집을 나갔을 거예요!"
그 뒤 그레고르는 가구마저 팔아 버려 휑한, 먼지만이 가득한 방에서 굶어 죽는다. 가족들은 비로소 더러운 벌레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느끼며 안도한다.
이 소설에서 카프카는 능력이 없어진 사람이 가족으로부터 당하는 소외와 천대가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 준다. 현대 사회에서 능력이 없어진 사람은 밥만 축내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인 것이다.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주인공 매기가 권투 중 척추 손상을 입어 전신 마비가 되자, 그녀의 가족들은 디즈니랜드를 구경하고 와서는 그녀의 마비된 손을 강제로 움직여 사인을 하게 한 다음 상금을 가로챈다. 능력이 없어지거나 병이 든 사람은 직장뿐 아니라 가족들에게조차 폐기 처분당하는 사회인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라는 말이 있지만 돈 문제가 끼어들면 '남보다 못한' 관계로 돌변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부모의 유산 문제로 재판을 벌이고, 늙고 병든 노부모를 버리며,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이처럼 삭막한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얼마 안 되는 서른 살은 멈칫하고 주저한다. 살아남기 위해 냉정해지고 계산적이 되어야 하는 건지, 그렇지 않으면 손해를 보고 이용만 당하면서 사회 변두리를 돌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는 건 아닌지 불안해진다. 그리고 이런 불안이 너무 크면 사회 초년병 시절 좌절을 겪고 실망했을 때 다시 일어서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나 다행히 세상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우리의 마음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눈물 흘리며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그리고 세상에는 규칙을 지키고 서로를 존중하는 사람이 규칙을 깨트리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비록 한 쪽에서는 파괴가 일어나고 있어도 다른 한쪽에서는 이를 재건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도우려는 이들이 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파괴적이고 위험한 충동들을 금지하고 조절하느 자아와 초자아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지나친 행동을 금지하는 규칙과 법이 있다. 물론 이 세상에 완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초자아나 법만으로 모든 위험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위험을 피하는 방법을 배우면 위험을 최소화시킬 수는 있다.
또한 아무도 자신을 100퍼센트 믿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100퍼센트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나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완전히 믿고, 남이 나를 완전히 믿어 주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이 위험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사는 방법은 이 세상 어디에도 완전히 안전한 곳은 없음을 아는 것, 세상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믿는 것, 우리 모두는 욕망과 충동을 지닌 나약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적절한 룰을 정함으로써 서로를 보호하는 것, 다른 사람들의 질투나 경쟁심 그리고 원한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 항상 겸손한 자세로 남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리고 자신이 피해를 입었을 때 그저 당하고만 있지 말고 적절히 대응하여 피해를 최소화하고 미래의 피해를 예방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
결국 믿을 만하고 안전한 세상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미치 앨봄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에서 주인공 에디는 평생을 루비 가든이라는 조그만 놀이 공원에서 놀이 기구 정비공으로 일했다. 전쟁에서 왼쪽 무릎을 다쳐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던 에디는 사랑하는 여자마저 일찍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뒤 자신의 인생이 참으로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더럽고 지루한 정비 일을 자신에게 떠안기고 죽은 아버지 탓이라고 생각해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에디는 아이를 구하려다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다. 그리고 죽은 뒤 처음 만난 파란 사내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그 사내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에디가 일곱 살 때 친구들과 공놀이를 하고 있는데, 친구가 던진 공이 길가로 날아갔다. 그러자 에디는 자동차가 오는 것도 모르고 차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에디는 간신히 공을 집어 친구들에게 달려갔지만, 에디를 피하려던 차는 트럭에 부딪혀 그 안에 타고 있던 파란 사내가 죽고 말았다.
에디는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차도로 뛰어든 자기 때문에 죽은 파란 사내를 보며 말한다.
"내 어리석음 때문에 나는 길에 뛰어들었고 나로 인해 당신은 죽었소. 왜 당신이 죽어야 했단 말이오? 이건 공평치 않아요."
그러자 파란 사내는 말한다.
"삶과 죽음에는 공평함이 없어요. 당신은 나 대신 당신이 죽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지상에서 살 때, 다른 사람들도 나 대신 죽었어요. 매일 그런 일이 일어나지요."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다는 에디에게 파란 사내는 말한다. 내가 죽어서 당신이 살게 된 것이 좋은 것이고, 타인이란 아직 미처 만나지 못한 가족일 뿐이라고, 바람과 산들바람을 떼어 놓을 수 없듯이 한 사람의 인생을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면, 그래서 고의가 아니더라도 서로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좀 더 조심스럽고 따뜻하게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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